[02] 동대문운동장

위치: 서울시 중구 을지로 281 (면적: 65,232㎡)
특징: 한국 최초의 근대식 운동장이자 한국 스포츠 역사의 중심인 동대문운동장

물리적 보전: 가능
사업방식: 자발적 보전
보전방식: 부분보전
물리적형태: 단지
소유형태: 공공

서울시민들의 뜨거운 추억을 간직한 한국 스포츠의 산실, 동대문운동장

동대문운동장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裕仁)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한 명목으로 지은 근대식 운동장이다. 경성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개장한 이 운동장은 당시 도쿄의 고시엔경기장(甲子園競技場)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 큰 규모로 25,000여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후 고교야구가 인기를 얻고 월드컵 예선전 등을 치르면서 서울운동장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하지만 1984년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의 주경기장으로 쓰일 잠실종합운동장이 완공되면서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한국 스포츠의 중심도 잠실운동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사업의 배경

동대문운동장의 체육경기가 줄어들고 운영에서도 적자가 계속 발생하자 재개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의 시행으로 청계천 주변 노점상들이 이주해오면서 동대문운동장은 스포츠 경기장으로서의 수명을 다하게 되었다. 이후 동대문 일대를 세계 디자인‧패션 중심지로 조성한다는 정책 기조가 만들어졌고 경기장의 기능을 상실한 동대문운동장이 그 중심시설 자리로 지목되었다. ‘서울시 도심재창조 종합계획(2006)’에 따라 동대문운동장의 철거가 결정되었고 2014년 4월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복합문화시설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Dongdaemun Design Plaza)가 그 자리에 문을 열며 동대문운동장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사업의 내용

2007년 철거시일이 다가오자 체육시민연대, 문화유산연대, 빈곤사회연대, 전국노점상총연합, 프로야구선수협의회 등 단체가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동대문운동장 철거 반대 투쟁을 벌이며 동대문운동장을 ‘경기장, 스포츠박물관, 공원’으로 활용하기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철거 계획은 큰 변동 없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문화재청은 2007년 근대문화재 분과회의에서 동대문운동장을 부분 보존하고 운동장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전시시설을 마련하는 것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시설전부를 헐어내는 대신 11개의 조명탑 가운데 2기와 성화대를 보존함으로써 동대문운동장의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존할 수 있었다.

동대문운동장의 조명탑은 1960년대 정부의 스포츠 분야에 대한 지원으로 설치되었던 것인데, 조명탑의 설치로 국내 최초의 야간 야구 경기가 1966년 10월 7일 열렸다. 조명탑 점등식 때는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들이 참석할 정도로 동대문운동장의 조명탑 설치는 당시 큰 행사였다. 한편 성화대는 1966년 장내 시설 증개축 시 설치된 것이다. 부챗살 원형 모양의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전국체육대회 개최 당시 처음으로 불을 밝혔으며, 이후 큰 규모의 체육행사가 있을 때마다 점화하였다.

동대문운동장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2014, 『잘가, 동대문운동장』
1966년 조명탑 점등식 장면(좌), 현재 동대문운동장 전시관과 조명탑(중), 성화대(우)의 모습


사업의 결과

동대문운동장의 조명탑과 성화대를 남김으로써 동대문운동장의 흔적을 보존할 수 있었다. 또한 매일 저녁 개최되는 조명탑의 점등행사와 성화대 앞에 설치된 설명문을 통하여 동대문운동장의 추억을 회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더불어 기존의 동대문운동장 부지 일부에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을 조성하여 근현대 우리나라 스포츠의 산실이었던 동대문운동장의 역사를 방문객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에는 옛 동대문운동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모형을 비롯하여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던 각종 스포츠행사 사진과 영상, 손기정·최동원·차범근 등 동대문운동장에서 활약하였던 유명 선수들의 소장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